
어느 조용한 골목,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달빛 서점. 낮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도, 밤이 되면 희미한 푸른빛이 창문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 서점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었다.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당신을 고른다."
처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규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하는 책을 집어 들면 서점 주인인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책은 당신을 원하지 않네요. 다른 책을 골라보세요."
그리고 마침내, 책 한 권이 손끝에 닿는 순간,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선택된 사람들은 책을 펼치고는 놀라곤 했다. 그 안에는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낯익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한 소년이 서점을 찾았다. 이름은 윤재. 그는 우연히 서점 앞을 지나가다가 달빛에 비친 책장을 보고 안으로 들어섰다.
“책이 날 고른다고요?”
윤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고, 서점 주인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곧 알게 될 거야."
소년이 손을 뻗자, 한 권의 책이 그를 향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그를 부르는 듯이. 그는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잊혀진 기억".
책을 펼친 순간, 윤재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책 속 이야기는 분명 처음 보는 내용인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들이 너무도 생생했다.
어느 해 여름, 한 아이가 숲속에서 길을 잃고 울고 있었다. 낯선 소년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그 장면을 본 순간, 윤재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건… 자신이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그는 어릴 적 한 번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어떤 기억이 툭 잘려 나간 듯 사라졌는데… 책 속에 나온 장면은 마치 그 조각난 기억의 일부 같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윤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서점 주인은 여전히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책은 단순한 종잇조각이 아니야. 때로는 우리가 잊고 있던 진실을 들려주지."
윤재는 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어린 시절 자신을 도와준 소년이 누구였는지 기억해냈다.
그 소년은 바로 자신의 형이었다.
하지만 윤재가 여섯 살 되던 해, 형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충격에 윤재는 형과의 기억을 깊이 묻어두었던 것이다.
책장을 덮자, 윤재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서점 주인은 조용히 말했다.
"이제 기억이 돌아왔으니, 너도 그 아이를 기억해줄 수 있겠지."
윤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는 오래전 잊고 있던 형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다시 찾으려 해도, 달빛 서점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